봄이 오는 길목에서
초록볼펜
문밖에는 이미 봄이 와있었다. 중부 내륙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져 종일 영하에 머물며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릴 거라는 날씨 예보가 있었다.
그런 예보를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면,
한파 주의보라거나
영하의 추위라는 말은
염두에 두게 되지 않았다.
인도에는 가로수의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잔뜩 물오른 봄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분명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친친 동여매고 걸어야 하는 추운 날씨였지만, 그 따사로운 기운은 고개 너머에 머물고 있을 봄을 마중 가야 할 정도로 따스했다.
누가 뭐라 해도 봄기운이 대지를 녹이고 있었고 봄이 문턱까지 와 있었다. 그래서였다.
몸이 붕 뜨면서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맞은편에서 자그마한 키의 중년 아저씨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오자, 나는 갓길로 피했으나, 나를 흘깃 보더니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휴대전화를 나에게 보이며, 지금이 10시 45분이니까 11시 차를 탈 수 있겠죠? 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출발하는 차를 타려는 것인지가 빠진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의 진중한 표정에서는 자신이 시간에 맞춰서 차를 탈 수 있을지를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파트 단지의 정문 쪽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었고 반대편 후문 쪽은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후문 쪽으로 걸어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버스를 타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가려면 1-2분이면 충분했다. 15분이나 남겨놓고 조바심을 낼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어눌하고 더듬는 말투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필요치 않은 질문을 건네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경미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11시 차를 탈 수 있을지를 누군가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네, 하며 활기차게 응대해 주고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더 이상의 말은 걸지 않았다.
잠시나마 다른이의 삶을 엿본 탓일까?
내 입에서는
"인생 참 힘들다!"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따스한 봄햇살을 음미하면서 걷다가 나타난 사내의 모습이 나를 더욱 애잔하게 만들어 놓아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김기태의 ‘무겁고 높은’ 소설을 떠올렸다. ‘힘들다’라는 말을 ‘무겁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탄광촌에 사는 송희는 역도를 하는 고3 여학생이다. 아버지는 광부였으나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석탄 박물관에 딸린 기념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무슨 위원이라는 아버지의 명함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생활비를 송희에게 준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 기도원에서 지낸다.
그녀는 100kg을 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녀는 졸업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역도장에 가서, 바벨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냥 손때 묻은 100kg의
쇳덩이일 뿐이라고.
여기서 바벨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운동 기구인 바벨과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바벨을 뜻하는 두 가지 의미이다. 작가는 이 두 가지 의미의 바벨을 하나는 무겁다고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높다고 말한다.
무거운 것은 바벨이라는 운동기구이고, 높은 것은 신의 권위를 보여주는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은 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9절에 기록된 이야기로,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며(BC2300~2400년), 하나님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해 세상 각지로 흩으셨다.
송희가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운동기구인 바벨을 그냥 손때 묻은 100kg의 쇳덩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짊어진 삶이라는 무거운 짐은 단지 우리가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무게일 뿐이지 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주제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고단한 삶만큼이나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달으면서도,
이 눈부신 봄날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신의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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