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껍데기가 사라진 지 20여 년이 흘렀다.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지만 내 안에서는 그만큼의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 못한다.
이른 아침 출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 엄마가 많이 다치셨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디고 내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 타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가자는 말에 바로 태워주는 택시는 없었다.
다행히 다급한 목소리 때문인지 원거리 운행이라서 돈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내 몸을 실어주는 차가 나타났다. 택시 안에서 나의 불안감은 커져 갔다.
‘어디를 얼마나 다치셨을까, 치료를 하고 계시기는 한 것일까, 어쩌다가 병원에 실려 갈 만큼 다치신 걸까?’
수없는 상상을 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으실 리가 없다. 아버지는 받으시겠지.
아버지의 번호를 눌러봐도 안 받으신다. 그래 치료나 입원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정신이 없으시겠지.
병원으로 직접 전화를 해봤다.
“이른 아침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박 아무개 씨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병원 직원의 건조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사망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를 툭 던지고는 전화는 끊어졌다.
그것으로 끝이다.
나를 태중에 품어주시던 육신의 껍데기는 이미 핏기 없고 차가워진 지 오래였다.
나와 함께 존재했던 이 생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아무에게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혼자서 생의 마지막을 마감하셨다. 어엿한 남편이 있고, 우리 남매를 그 육신으로 품으셨다가 이 세상에 내놓으셨는 데도 생을 마칠 때는 아무도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도 정신을 놓으셨다. 장례를 치루기 시작하고 만 하루가 지나도록
“아버지가 이렇게 아픈데도 네 엄마는 한 번도 와보질 않는다, 쯧쯧.”
이같은 속 타는 소리로 엄마를 원망하는 말씀만 하신다. 함께 당하신 사고를 기억 못 하시는 것이다.
‘홀로 떠나셔야 했던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시며 눈을 감으셨을까, 얼마나 두렵고 외로우셨을까?’
이 생각은 오랫동안 두고두고 날 아프게 했다.
내 기억 속 껍데기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에 오셨던 모습이다.
은은하게 곱고 밝은 색 한복을 입으셨다.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지 않도록 한 쪽 허리에 가지런히 둘러서 잡으시고,
다른 한 손에는 아마도 선생님께 드릴 음료수를 들고 새색시 걷듯이 정갈한 걸음걸이로 교정에 들어오셨다.. 평생 농부의 아낙으로 살던 분이기에 늘 일하기 편한 헐렁한 바지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 조금 꾸몄다면 꽃무늬 블라우스를 걸치시던 분이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의 모습은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이라서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껍데기는 여느 시골 아낙들 모습처럼 우악스럽거나 거칠지 않았다. 목과 허리가 길고, 아버지만큼 키가 크셨기에 그런 모습이 썩 잘 어울리셨다.
대농을 해 오시던 아버지 덕에 평생 농사일을 도우시고 대가족을 살피느라 정작 자신의 모습을 가꿀 시간과 상황이 허락지 않았던 것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날 어머니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자주 떠오르곤 했다.
위로 딸 셋을 차남들에게 출가시키니 제 때에 아들 손주를 품에 안겨 드렸다. 그러나 넷째 딸을 보내 놓으시고는 걱정이 많으셨다. 장남에 외아들이고 직업이 공무원이라서 팍팍한 살림이 될 게 마음에 걸리셨던 것일 테다. 더군다나 아이가 안 생기니 더 걱정이 크셨다. 다행히 넷째 딸도 아이를 가졌다. 유난히 아이들을 예뻐하던 넷째였으니 지 자식은 얼마나 끔찍이 여길까. 그러나 내 자식이 귀한 건 인지상정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품에 안고 내려놓지도 못한 것은 육아에 모든 것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런 넷째가 엄마 눈에는 안쓰럽다. 육아에 지친 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을 찾을 때면 밥 먹는 것도 힘들어하던 딸아이 품에 있는 손녀를 둘러업으시며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누가 지 껍데기 아니랄까 봐 떨어지질 않네”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등에 업으시곤 마실을 나가셨다가 한참 만에 돌아오신다.
지친 내가 편안히 밥을 먹고 낮잠을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등에 있던 아이를 기어코 재우셨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밥상을 새로 차리신다. 먹기 싫다고 해도, 아이 엄마 배 굶게 하면 용머리가 화를 낸다며 한사코 내가 밥술을 뜨는 것을 보시고 만다.
아이 보는 일에 서툴러서 인지 낯가림이 유난히 심한 아이라서 그런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놀 때도 분유를 먹을 때도 잘 때도 내 품이 아니면 칭얼대며 엄마인 나만 받쳐댔다. 그것은 내 탓이다. 늦게 가진 아이가 귀하고 사랑스럽다고 눈과 손에서 떨어트리지 못한 순전히 내 탓이다. 내 껍데기인 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당신의 알맹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하셨던 모습을 기억한다. 유난히 가정적이고 사랑이 남달라서 자식들과 말씀도 많이 섞으시며 이런저런 말씀을 참 잘해주셨다.. 그리고 육아를 도와주실 때마다,
“엄마는 껍데기다. 알맹이가 튼실하고 빛깔 좋게 영글도록 다듬어 주는 것이 껍데기가 해야 할 일이야.”
꼼꼼하게 양치질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나, 긴 머리를 감아야 할 때,,, 내가,,, 성장해서 첫 여성성을 갖게 됐을 때 뒤처리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때도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엄마가 품으셨던 알맹이들은 새 생명을 품고서 또 다른 알맹이들을 세상에 내놓은 껍데기가 되었다.
먼 시간 속에서만 함께 존재했던 그 껍데기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알맹이를 키우고 다듬으면서 살아간다.
이 알맹이들도 세월이 흘러 새로운 깍지 안에 알맹이를 품고 껍데기 되겠지?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행(同行) (1) | 2023.09.28 |
---|---|
나에게 행복이란? (0) | 2023.09.20 |
끝끝내 나로 살아가는 법 (0) | 2023.08.07 |
독서 이야기 (0) | 2023.07.23 |
내가 책을 읽는 다는 의미 (0) | 2023.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