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자식 상팔자
현관 앞 화단에 핀 봉숭아꽃이 발길을 잡는다.
추억의 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백반과 곱게 핀 꽃잎, 잎사귀를 함께 빻아서 손톱에 물을 들여 주셨다. 밤새도록 비닐로 감싸서 실로 꽁꽁 묶어두고 아침까지 기다려 주면 손톱과 주변 살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봉숭아꽃 물들이기는 꽤 신기하고 재밌는
전통놀이가 되었다.
여러 날이 비로소 손톱 위에서만 고운 빛을 뽐낸다.
이제 내 아이에게 해 줄 차례다. 어렸을 때 경험한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꺼내어 아이에게 해주면 아인 영락없이 신기해하며 즐겁게 따라 준다. 역시나 이 아이와는 모녀지간이 아니었어도 궁합이 참 잘 맞았을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심장이 아리도록 행복한 경험이다.
꽃잎을 한가득 따왔다.
백반이 알레르기가 있을까 봐 소금으로 대체해서 하얀 종지에 넣고 빻는다. 벌써 가슴이 벅차오른다.
분명 딸아이가 좋아할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하고 있으면 빨개지는 거야?”
“응, 그러니까 답답해도 비닐 벗겨내면 안 돼.”
신신당부를 해도 잠결에 비닐을 벗겨진 몇 개의 손톱은 물감을 칠하다 만 것처럼 얼룩진 모습이다. 곱게 물든 손톱을 보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아이의 이런 모습은 행복을 더욱 단단하게 여며준다. 이른 가을날에 핀 봉숭아꽃 덕분에 두고두고 꺼내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의 선물이란 걸 안다.
대입을 앞둔 딸아이가 변하기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지낸 딸아이가 안쓰러워서 대화라도 하고 싶지만 집에 돌아오면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과일이라도 먹을까 하는데 자신의 접시만 들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아쉽지만 아이의 상황과 기분을 알기에 존중한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만큼이나 엄마 마음도 답답해진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 그렇듯 입시 스트레스가 크다. 그래도 그렇지 본인만 입시를 치루나?
유난스럽기가 전쟁통 같은 사회의 입시 분위기가 원망스럽다. 엄마 옆에서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천진한 아인 이제 사라졌다. 주말 내내 학원에 묶여 있거나 집에 있는 날에도 책상에 붙어있다.
내 곁을 지키던 사랑스럽던 아이가 책상과 의자와 붙어버렸다. 수능이 아이들의 미래와 꿈을 바꿔버리는 이 사회의 어긋난 교육 시스템이 원망스럽다.
입시가 끝나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다행히 아인 다시 예전의 애교 많은 아이로 돌아왔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까탈스럽고 무뚝뚝한 얼굴도 사라졌다. 입시를 무사히 마친 딸아이를 위해서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선물했다. 항공권 예약부터 호텔과 여행지에서의 계획을 내가 준비했다.
한방에서 자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행복이다.
단 한 번도 언쟁 없이 여행 기간을 보낸 모녀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행복의 기준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그 기준이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희열과 감동은 비슷하지 않을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한 사람이 있고, 명예를 얻으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 이런 만족이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행복만큼 벅찬 감동을 주진 못한다. 그것도 내가 태중에 열 달을 품고 있었던 핏줄로 인해서 느끼는 행복은 시시때때로 행복에 겹다.
행복이란 말만 들어도 아이가 떠오른다. 존재 자체가 행복인 아이가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을 때,
'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로 태어나 내게 이런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을까. 딸아이를 생각하면 입꼬리가 먼저 반응한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불면증도 완화되어 편안한 잠자리에 든다. 엄마의 이런 속사정을 알기에 이제 갓 성인이 된 딸이 내 보호자 역할을 하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자녀가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어도 부모에게는 마냥 어린아이인 것처럼,
성인이 된 아이지만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타인의 눈에는 어리광을 부리는 철부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 딸아이는 진지함과 순수함을 갖춘 자랑스러운 아이다.
내 곁에서 희망과 행복을 주는
나의 알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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